– 우리네 큰 어른 –
退溪 이황, 萬代의 師表
퇴계는 뉘인가? 당대에도 그 이름 널리 떨쳤을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가까이, 한국은행의 천원권 지폐 속에 계시니 도처에서 쉬이 찾아뵐 수 있다. 고금의 중국과 대만 그리고 일본에서는 일찍이 퇴계학이 활발히 연구되고, 여기 유럽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 국제퇴계학회가 존재한다. 실히 만대의 사표(師表)로서 동방의 주자, 성리학의 완성가로서 추앙받는 이퇴계를 과연 우리는 올바로 알고 있는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우리네 큰 어른’, 그 첫 번째 인물로서 퇴계 이황 선생에 대하여 삼가 논하고자 한다.
도산서당과 도산서원
먼저 퇴계선생을 뫼신 도산서원으로 들겠다. 현 안동시에 속하여 영지산에서 이어지는, 옛 지명 예안의 도산 산자락에 자리 잡은 도산서원은 영남유림의 총본산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서원으로써, 선생께서 명종 십육년(1561)에 도산서당을 설립하고 학문에 힘쓰신 이래로 수없이 많은 후학들이 그 명맥을 이어 나아갔다. 송대 성리학자 주희의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우러러 그 이상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1557년 도산에 터를 잡고 손수 설계하며 몸소 지어 1561년에 완공하였다. 또한 주자의 기문에서 발취하여 가운데 방은 완락재(玩樂齋), 동쪽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하여, 학문을 대하는데 있어서 ‘즐기며 완상하니 싫증나지 않네; 樂而玩之 固足以終吾身而不厭’, ‘스스로 오래 미치지 못함을 바위의 효험에 살포시 기댄다; 自信久未能 巖栖冀微效’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 그러한 도산서당을 실지로 바라보면 과연 조선 성리학의 거봉이 거하던 곳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아주 소소하다. 하지만 그 건축학적 의의를 김봉렬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는 ‘최소의 구조, 최대의 공간’이라 칭하였음에, 불필요한 공간은 줄이고 필요한 공간을 극대화 한 도산서당의 구조만으로도 우리는 선생의 인품과 학문적 깊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꾸밈을 배제한 단조로운 맞배지붕, 질박한 기둥을 알맞게 들임과 냄으로써 실용적으로 설계한 내부구조, 창호를 간소하게 또 각기 쓰임에 맞게 크기를 달리한 효율적 배치 그리고 아무런 치장 없는 새하얀 회벽으로 말미암아 생각건대, 이 소박한 건축을 통해 선생께선 스스로 나아가고자한 선비의 이상을 건축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위엄을 갖추지 않았으나 오히려 장엄하도다.
이러한 도산서당은 도산서원의 기반이 되는 곳이다. 선생 사후 후학들은 도산에 선생을 모시는 사당 건립을 시작으로 서원을 세우기 시작하여, 선조 팔년(1575)에 도산서원으로 사액 받고 이듬해 완공한다. 서원으로써 보다 체계화되고, 영남을 넘어 팔도의 유림이 모여 학문을 논하고 갈고닦는 학당의 기틀이 잡힌 것이다. 후학들은 서당을 그대로 유지하고 그 공간에 맞게 서원 각각의 부속건물들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그 아름다움과 학문적 깊이를 더함에 조선시대 여타 서원들의 모범이 되었다. 사액 당시 선조는 당대의 제일가는 명필 石峯 한호로 하여금 현판의 글씨를 쓰게 하였다. 여기에 재밌는 일화가 전하는데, 천하의 한석봉도 이 위대한 스승을 기리는 현판의 글씨임에 혹여 긴장할까 선조임금은 저 현판의 [도산서원]자 하나하나를 거꾸로 읊어 한호에게 받아쓰게 했다고 한다. 덧붙여, 선생은 사액서원의 선례를 남긴 이이기도 하다. 사액서원은 조선시대의 사립대학이라 볼 수 있으며, 사액(賜額)이란 임금이 사당이나 서원 등에 이름 지어 편액을 내리는 것을 뜻한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주자학을 이 땅에 들여온 고려의 학자 안향을 배향하고 사림의 배움터로 세운 백운동서원에 퇴계 선생은 조정에 사액 내리길 청한다. 이에 명종은 손수 어필로 쓰고, ‘旣廢之學 紹而修之, 쇠퇴해버린 학문을 다시금 이어 닦으라’는 뜻으로 소수서원이라 사액한다. 영주의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으로 사액되며 국가로부터 공인받고 지원받는 사액서원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소수서원을 필두로 팔도에 서원이 흥성하여 성균관과 각 지방의 향교와는 또다른 배움의 장이 융성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유구한 역사와 그 가치를 인정받아, 도산서원과 더불어 소수서원, 병산서원, 필암서원 등 총 아홉 곳의 서원이 작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바 있다. 아울러 도산서원은 謙齋 정선과 豹菴 강세황의 회화로도 옛 모습이 전해진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겸재가 진경산수화풍으로 그린 도산서원도는 지금의 모습과도 거의 다르지 않으며 주된 특징을 빠짐없이 잘 묘사했다. 또한 ‘知者樂水 仁者樂山,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는 공자의 말씀처럼, 도산 기슭에 고이 자리잡은 도산서원 앞 여여히 흐르는 낙동강과 푸르른 녹음으로, 자연에서 배우고 즐기며 함께한 선생의 사상과 일상을 여실히 표현해 내었다.
퇴계선생의 생애와 드높은 학덕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이 예안은 공맹의 고향과 같다하여, ‘鄒魯之鄕추로지향’(공자가 난 노나라와 맹자가 난 추나라와 같이 성인이 난 곳)이라 일컬어졌다. 공자와 맹자의 종손들이 이 도산서원에 다녀간 적이 여러 차례 있는데, 1980년엔 공자의 77대 종손인 공덕성 박사가 삼가 선생의 신위에 배알하고 흠모하는 마음을 담아 단정한 전서(篆書)로 그 추로지향 넉자를 쓰고 해서(楷書)로 그 명목을 밝혔다. “경신년 12월 8일 삼가 도산서원에 나아가 퇴계선생의 신위에 배알하고 강당에 올라 끼치신 원규를 우러러보니 흠모하는 마음 더욱 드러나매 이를 돌에 새겨 기록한다.” 도산서원으로 드는 길목에 이 비가 세워져있다.
인향만리
酒香百里주향백리 花香千里화향천리 人香萬里인향만리, 좋은 술 향기는 백 리를 가고 아름다운 꽃향기는 천 리를 가며 사람된 향기는 만 리를 간다. 여러 일화를 통하여 500년의 세월을 넘어 선생의 그 사람된 내음이 우리에게 전해진다. 동방의 주자로 칭해지는 선생은 오히려 느즈막한 나이에 주자의 저작을 집대성한 <주자전서>를 접하고 탐독하며 궁리하여 조선의 성리학을 재정립해 나아갔다. 중에 그 유명한 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과의 사단칠정논쟁 이른바 사칠논쟁을 하게 되는데, 이는 동양사상사를 넘어 세계철학사에 길이 남을 학문적 논쟁이거니와 그로 들어난 선생의 인품, 인향은 자못 아름답다. 그 발단은 이황이 秋巒 정지운의 <천명도설> 중 發於理과 發於氣(사단은 리로써 드러나고 칠정은 기로써 드러남)를 理之發과 氣之發(사단은 리의 드러남이며 칠정은 기의 드러남)로 고침에, 이를 우연히 본 기대승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사상적 논제를 여기서 모두 다루기엔 가볍지 않아, 차후 따로 기고할 수 있도록 하겠다. 필자가 논하고자 하는 바는 이 역사적 논쟁을 통하여 드러나는 선생의 인품이다. 1558년의 가을 한양, 이황에게 기대승이 찾아뵈었다. 58세의 노학자와 32세의 새내기, 성균관 대사성에 이른 이와 이제 막 과거 급제한 이와의 만남이었다. 그럼에도 기대승은 예를 갖추되 당당히 스스로의 소신을 밝혔고, 선생은 고봉의 주장을 차분히 들으시고 또 서로의 관점을 논했다. 이후로도 여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의를 이어나갔다. 논쟁은 성리학에서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찌 받아 들이냐 하는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이(理, 우주만물생성의 원리이자 불변하는 이치)와 기(氣, 만물을 구성하는 자연과학현상적 요소) 그리고 사단(四端,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인의예지의 단서)과 칠정(七情, 사람이 가진 일곱 가지 감정)에 대한 정의와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함이었다. 주된 논점인 사람의 심성에 대한 의견차는 선함의 절대성 확립을 통한 절대적 선의 추구와 이론적 합리성을 추구함의 차이에 있었다. 때문에 공부의 대상과 방법의 차이가 생겨나고, 이는 성인(聖人)으로 나아가는 길에 대한 시각의 차이로 드러나 학파가 나뉘고 붕당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같은 8년간의 웅혼한 논쟁 끝에 선생은 기대승의 주장을 일부 받아 들여 선생 자신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수정했다. 26년의 나이차를 넘어 상대의 견해에 경청하며 잘못된 바를 스스로 고칠 줄 아는 자세는 현재에 뭇 학문을 대하는 이들이 본받아야 마땅할 바다.
더불어 선생의 人香(인향)을 전하는 일화가 있으니, 선생의 일생에 함께 했던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먼저 일찍이 과부가 된 선생 모친의 이야기로, 선생의 어머니 춘천박씨 부인은 33세의 나이에 부군을 잃고 슬하에 7남매를 홀로 길러내야 할 처지가 되었는데 당시 퇴계선생은 고작 7개월 된 갓난아기였다. 그런 여건에도 불구하고 모친은 농사짓고 누에치기를 밤낮으로 힘써 아이들을 길러내었다. 뿐 아니라 몸가짐과 행실을 삼가는 것을 당부하는 등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가르침도 틈틈이 전하셨다한다. 지금 필자가 몇 자 몇 문장으로 옮겨 썼으나 선생 모친께서 살아간 그 찰나와 세월은 얼마나 고독했을까. 그러한 모친의 삶을 선생은 묘갈명으로써 지어 남기신 바 있다. 어머니가 삶을 대하는 자세를 곁에서 보고 배운 바는 선생 인품의 근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물한살에 선생은 김해허씨에게 장가들어 장남 준과 차남 채를 낳았다. 허나 7년 만에 허씨 부인은 다섯 살의 준과 겨우 한 달된 채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선생의 나이 서른에, 예안서 귀양살이하던 권질(權礩)의 딸을 부인으로 맞는다. 첫째 부인 사별 후 삼년 만이었다. 둘째 부인에겐 한 가지 흠이 있었으니 권씨 집안의 참극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이었다. 온전치 못함으로 혼기마저 넘긴 딸자식 걱정에 권질은 퇴계에게 딸을 부탁하고, 그녀의 조부 되는 花山 권주(權柱)를 흠모했던 선생은 이를 받아들여 부부의 예를 올렸다.
그 둘째 부인 안동권씨가 한번은, 일가친척이 종가에 모여 제사를 지내려 상을 차려 놓았는데, 제사도 지내기 전 권씨 부인이 제사상의 음식을 집어 들었다. 예를 엄히 따지는 유학자의 집안에서 그것도 제삿날에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선생은 부인을 따로 불러 그 연유를 물었다. 그녀의 답은 단순했다. 먹고 싶어서였다. 이에 선생은 말없이 부인에게 음식을 손수 챙겨 줬다한다. 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이 선생의 예는 곧 예학의 지침이라 칭했을 정도로 선생은 예학에 통달한 학자였다. 그러한 선생이 제사상의 음식을 집어먹는 잘못을 예로 따지기보단, 부인의 몽매함을 넓은 아량으로 품었던 것이다. 하루는 선생이 상갓집에 조문을 가려는데 닳아 헤어진 흰 도포자락을 보고 부인에게 기워주길 부탁했다. 권씨 부인은 그런 새하얀 도포에 빨간 헝겊으로 꿰매어 버렸는데, 선생은 아무렇지 않게 그대로 입고서 집을 나섰다. 상가서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예학에 정통한 선생에게 혹여 흰 도포에는 빨간 헝겊으로 기워 입는 예법이라도 있느냐 여쭈었다고 전한다. 이 일화는 한양의 궐에 들기 위한 과정에 일어난 해프닝의 버전도 있다. 당대에도 이미 큰 학자로 널리 알려진 퇴계가 새하얀 도포에 빨간 헝겊으로 기워 입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구전이긴 하나, 이러한 일화로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은 자못 크다.
선생의 장남 이준(李寯)의 부인이자, 며느리인 봉화금씨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로, 아들의 혼롓날 선생은 손님으로 사돈댁에 방문했다. 그런데, 명문가로 이름 떨치던 사돈댁에 비해 보잘것없는 가문이란 이유로 사돈댁 문중의 홀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선생이 사돈댁을 나서자 앉았던 마룻바닥을 물로 씻고 대패로 밀어버리는 수모를 당했다. 이 일이 선생의 집안에 전해졌고 문중사람들은 으레 분개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차분히 타이르길, “사돈댁에서 무슨 말과 무슨 행동을 했든,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가문의 명예란 문중에서 떠든다하여 높아지는 것도, 또 남이 헐뜯는다하여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스스로 예를 지키지 않으면 그것이야 말로 보잘것없는 가문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 문장을 읽고 한동안 스스로를 돌이켜 보았다. 여하간 이러한 사돈댁의 실례에도 선생은 며느리를 생각하여 부탁함에, 문중에선 이를 불문에 부쳤다. 시아버지로서 선생은 며느리의 건강을 살뜰히 챙기고 극진히 대했음을 아들과 나눈 편지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아버지를 둔 맏며느리는 유언으로, “시아버님 생전에 여러모로 부족하고 극진히 모시지 못하였다. 죽어서라도 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프니 내가 죽거든 필히 아버님 묘소 가까이에 묻어 달라.”라 당부했다 하며, 실제로 선생의 묘소 아래 멀지않은 곳에 그녀가 모셔져 있다. 선생의 둘째 며느리는 기구하게도 어린 나이에 미망인이 되는데, 둘째 아들 이채(李寀)가 16세에 장가들어 22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당시는 성리학의 이념 아래 아녀자는 두 번 혼인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생은 애통함을 뒤로한 채 장남에게 편지하길 속히 개가(改嫁)하기를, 요샛말로 재혼하여 새 집에 시집가는 것을 허락한다. 이렇게 선생은 일찍이 과부가 된 둘째 며느리를 개가시킨 사실이 있다. 이토록 선생은 며느리들에게까지 자애로우셨다. 아울러 중국의 일부 예법이 여자를 낮춘 것을 바로 잡고, 과도한 예법만을 따르다 폐단에 이르는 잘못된 풍속을 바로 잡는 등 예법을 합리적으로 정비해 나갔다. 또한 집안 여종에게 여종의 석달된 아이를 놔두고 한양에 올라 어미 대신 젖 먹여 증손자 안도를 살리려고 하지 않은 일화, 당시 천민신분이었던 대장장이 배순을 계층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제자로 받아드린 등의 일화가 전한다. 이러한 일화는 모두 단적인 예이며, 일부는 구전으로 전하는 바이나 모두 사실을 기반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선생이 몸소 실천한 바에 의거하여 우리는 유교가, 유학의 본질이 고리타분히 예법만을 따져 고집하고 불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학십도와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이러한 이야기로 드러난 선생의 마음과 언행의 근원은 바로 선생께서 평생에 걸쳐 강조하고 실천하신 ‘敬’에 근본을 둔다. 선생의 역작인 <성학십도>에서 이르시길, 지경(持敬, 공경함을 보존함)은 곧 學思動靜文質彬彬 생각과 배움을 함께 하고, 동(動)함과 정(靜)함을 일관되게 하며, 속과 겉을 일치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 하셨다. <성학십도>는 유학의 요체를 도식화한 열가지 도표와 그에 따른 해설로 엮어, 막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올리는 선생의 만년작 중 하나 이다. 서문에서 선조에게 이르길, “도(道)는 형상이 없고 하늘은 말이 없습니다. 성인(聖人)이 이치를 밝혀 도가 비로소 천하에 드러났으나, 도는 드넓어 어디서부터 손을 댈 것인지 알기 어렵고 천만가지 되는 가르침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알기 어렵습니다. 하여 옛 성현들이 그림과 해설로 학문의 뜻을 밝혀 도로 들어가는 문과 덕을 쌓는 기틀을 마련한 것입니다. 하물며 임금 한 사람의 마음이란 만 가지 정무의 까닭이 되는 곳이며, 백 가지 책임이 모이는 곳이고, 온갖 욕심과 온갖 간사함이 갈등 일으키며 침해하는 곳일진대 한 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히 하여 멋대로 행동한다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들끓는 것 같을 것이니 그를 뉘가 막겠습니까. 때문에 옛 성군(聖君)들은 이를 근심하여, 삼가고 두려워하고 조심하고 신중히 날마다 하기를 날마다 함에도 부족하게 여겼습니다. ··· 공자께서 이르시길,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 하고서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하셨습니다. 배움이란 익히고 또 익혀 진실로 실천함을 일컫는 것입니다. ··· 신(臣) 이황은 근포(芹曝, 미나리와 햇볕 쬠)의 정성(고사에 어떤 이가 미나리를 맛보고는 맛이 좋아 임금께 바치려 하였고, 또 어떤 이는 추운 겨울 햇볕을 쬐다 따뜻함에 임금께 그 방법을 아뢰려했음을 전한다. 임금에 대한 백성의 애틋한 충정을 뜻한다)을 이기지 못하여 성상의 위엄을 모독함을 무릅쓰고 이를 올리니 황송하여 물러나 처분을 기다립니다.” 본인은 처음 이 서문을 읽었을 때 마치 베토벤 3번 교향곡 <영웅>의 첫 악장을 처음 들었을 때와 흡사한 충격을 받았다. 율곡 이이는 선생 평생의 학문이 응축된 결실이라 평했으며, 이 응축물에 상응하는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없음이라.
조선은 당대의 큰 인물이 서거하면 실록(조선왕조실록)에 졸기(卒記)로써 그 삶을 축약해 평하였다. 선조수정실록에 이르길, ‘선조 삼년(1570) 12월 8일,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이황이 졸하였다. 그에게 영의정을 추증하도록 명하고 부의와 장제를 예(禮)대로 내렸다. ··· 사대부와 유림은 이황이 아니면 성덕(聖德)을 성취키 어렵다 했고 ··· 세상에서는 그를 퇴계선생이라 이른다.’ 연산 칠년(1501)의 예안, 현 안동 도산면 온혜리에서 나시어 어려서부터 스스로 학문에 힘쓰고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된다. 문하에는 月川 조목과 西厓 류성룡, 鶴峯 김성일 등 제자가 삼백여명에 이르렀고 후학들은 조선을 이끄는 사상계의 기둥이 되었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선조임금은 사흘간 정사를 파했다 전한다. 정조대에 이르러선 선생을 기려 특별 과거시험을 도산서원에서 치렀는데, 이에 유생들이 구름처럼 모여 고시에 응시한 이가 수천에 이르렀다한다. 선생께서 돌아가신지 222년만 이었다. 이를 기념하고자 정조는 비와 비각을 세우라 명하였으니 도산서원 앞의 시사단(試士壇)이 그것이다.
향년 70세, 죽음을 앞둔 선생은 조카 영(李寗, 1527~?)을 불러 유언을 남기는데, 자그마한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는 비명(碑銘)과 스스로 미리 지어 놓으신 명문만을 새겨 세우라 하셨고, 또한 장례를 간소히 할 것을 당부하셨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열 자와 4언(言) 24구(句)의 자명(自銘) 아흔여섯 자. 묘비명에는 관직, 직함, 선생이란 말 하나 없고 혹여 자신의 생애를 과장할까 96자의 문장으로 살아온 삶을 겸손히 축약하신 것이다.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퇴도; 아호 퇴계와 도산에서 딴 선생의 또다른 호 · 만은; 뒤늦게 은거하는 · 진성이공지묘; 진성이씨 한 사람의 묘라는 소박한 묘갈명이다. 실제 묘갈을 보면, 비명 옆으로 선생이 미리 지어 놓은 자명을 새겼고, 뒤로는 왕명으로 기대승이 이어 지은 기문이 있다. 기대승은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비문에 모두 담지 못함에, 다음의 문장으로 재차 명문을 지었다. “세월 흘러 산도 허물어져 낮아지고 돌도 삭아 부스러지겠지만, 선생의 명성은 하늘 땅과 더불어 영원하리라.” 차후 선생께 문순공(文純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또한 문묘에 종사되고 종묘에 배향되었으며 불천위라 하여 대대로 영구히 모실 수 있게 되는, 즉 문묘(文廟) · 종묘(宗廟) · 가묘(家廟)의 삼묘(三廟)에 배향되는 영예를 얻으셨다. 만대의 사표로서 오백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향기 전하며 오백여년이 지나서도 여여히 향을 발하실 우리네 큰 어른. 칠십 평생 知行竝進(지행병진), 앎과 행함을 아울러 나아감을 실천한 삶. 星湖 이익은 ‘선생의 언행으로 사문(斯文, 유가의 도의)의 맥을 부지하였다’라 그 삶과 학문의 위업을 평했다.
선생은 일평생 수많은 시를 남겼고 그 중에 선생께서 퇴계라 아호를 지으신 연유가 잘 드러난 시가 한 수 있다. 그 시를 끝으로, 삼가 선생의 생애를 논함에 폐가 된 바 없는지 돌이켜 보며 글을 맺는다.
몸 물러나 어리석은 분수에 편안하나 身退安愚分
배움 퇴보할까 늙음이 근심이노라 學退憂暮境
시냇가에 비로소 거처를 정하여 溪上始定居
흐르는 물에 날마다 반성하네 臨流日有省
글 三樂(삼락) 박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