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살면서 안타까운 점 중에 하나는 한국의 문화 트렌드에서 언제나 조금 뒤쳐진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어떤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며 이러저러한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던가, 어느 가수의 신곡을 모르면 간첩이라던가, 어떤 영화를 아직 보지 못했다면 문화인이 아니라던가 하는 젊은이들의 우스개 소리들이 그저 흘려 들을 수 만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요즘 한국에서는 실제 우리 역사를 바탕으로 한 영화나 혹은 옛날 그 어느 시절 있었음직한 사건을 상상하여 제작한 드라마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영화가에서 화재가 되었던 작품은 배우 조인성씨가 주연을 맡은 김광식 감독의 영화 ‘안시성’이다. 최근에야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면서 고구려 역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상대적으로 먼 시대적 배경과 또 그 공간적 배경이 현재는 갈 수 없는 북한 땅이나 저 먼 중국에 기인한다는 한계에 부딪혀 백제나 신라, 조선의 역사와 비교해 볼 때 우리에게 거리감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를 설레게 하는 고구려. 그 용맹스런 이름 뒤에 어떠한 역사들이 숨어있을까? 오늘은 영화 안시성 뒤에 펼쳐진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안시성은 과연 어디에?
‘안시(安市)’란 본디 고구려의 옛 방언으로 큰 새를 이른다는 말이 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이 봉황성으로 부르던 고구려의 성이 수나라와 당나라를 지나며 안시성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매김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안시성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냐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자들 간에 시시비비가 있다. 따라서 안시성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미궁에 있다고 하겠으나, 비교적 많은 학자들은 중국 요령성 해성시의 동남쪽에 위치한 영성자산성이 안시성이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조선 시대 중국을 다녀온 사신들이나 수행원들이 남긴 기행문인 [연행록]에는 안시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봉산 남쪽으로 5리쯤떨어진 곳에 삼면이 수십 길의 암석으로 둘러싸인 천운암, 혹은 고장대라 부르는 높은 봉우리가 있다. 고장대는 북쪽을 제외한 삼면은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험한 절벽인데 이 험한 산세를 의지하여 북쪽에 석벽을 쌓아 올려 만든 성이 안시성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안시성의 대부분은 산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성의 북쪽 2리(약 800m)가 실제 쌓아올린 성의 길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고구려의 높은 석성은 이곳에서 찾아보기 힘든데 이는 안시성의 위치에 대한 잘못된 추정의 결과거나 혹은 성의 대부분이 지난 세월 속에 유실되어버린 안타까운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필자가 아직 어릴 적, 중국여행 중에 광개토대왕릉을 보고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다듬어진 돌들로 올려진 고구려의 무덤은 실로 새로운 것이었으나, 관광 중 점심식사 시간에 들렀던 식당에서 조선족들이 이 식당 문을 세우기 위해 놓인 큰 돌들이 광개토대왕릉에서 가져온 것이라 말하는 것을 듣고 기가막힘과 분함을 누르지 못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안시성의 보존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미쳐 돌아보지 못하는 사이 그 위대했었을 석성의 돌들이 하나, 둘 누군가의 집이나 마당이나 혹은 밭으로 이전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과연 누구에게 그 책임이 있다 하겠는가.
안시성 전투의 배경 – 연개소문
안시성 전투(645)는 고구려 역사의 거의 마지막 장의 기록이다. 당시 고구려의 왕위는 제 28대 보장왕(642-668)에게 있었다. 그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으로 연개소문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나라를 잃고 당나라로 압송당했던 비련의 인물이다. 하지만 어찌하여 연개소문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고 하는가?
그렇다. 당시 고구려는 대국 당나라와 국경을 마주하며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의 천리장성 축조만 보아도 알 수 있듯, 고구려는 수나라를 이어 강국으로 성장해가는 당나라를 경계하고 또 경계하였음이 분명하다. 이런 고구려가 당나라 입장에서는 반가울 리 없었다.
중국과의 관계에 대하여 고구려 정부는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 졌는데, 당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던 영류왕(고구려 제 27대 왕)과 강경책을 들고 일어선 연개소문이다. 당시 연개소문의 위엄은 이미 상당했었던 것 같다. 굳이 그 가문의 힘을 등에 업지 않더라고 어린시절부터 타고난 그의 비범함과 영특함은 빛을 발했다. 무엇보다 그는 뼛속까지 고구려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전쟁을 하더라도 고구려는 절대 당나라에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는 그의 자부심 혹은 애국심은 당나라에 저자세를 취하는 영류왕의 외교정책에 반정이라는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쿠데타를 통해 사실상 고구려 최고의 권력을 손에 넣은 연개소문은 보장왕을 왕으로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오늘날의 총리)의 자리에 오른다. 가뜩이나 눈의 가시였던 연개소문이 자신들의 손을 들었던 영류왕을 제거하고 나라의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은 고구려를 침략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당나라에게 둘도 없는 기회였을 것이다. 이를 빌미로 당 태종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한다.
양만춘과 안시성 전투
양만춘은 보장왕 당시 안시성의 성주이나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을 당시 그에게 끝까지 복종하지 않고 성을 지켰다는 기록은 그의 기백과 소신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안시성은 철광석이 풍부한 지역으로 고구려 시대에도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이 지역에는 철광석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중화학 단지와 철강 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당시 고구려 군은 이 지역의 철을 이용하여 무기를 만들어 군대를 무장시키고 병마까지도 철갑으로 덮어 ‘개마군사’라는 강력한 군권을 자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드디어 645년, 당 태종은 육군과 수군을 동시에 이끌고 대대적인 고구려 침공에 나섰다. 사실 이 전투는 이미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된 정복전쟁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4년 전인 641년, 당 태종은 고구려에 사신 진대덕을 보내는데 그는 병부에 속해 지도를 관리하던 자였다. 따라서 당 태종이 그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낸 배후에는 고구려 정탐의 보고서 작성이라는 전략적 한 수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전쟁이 시작된 후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등 안시성보다 크고 이름있는 요동의 성들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당은 이 기세를 몰아 안시성으로 쳐들어왔다. 당시 안시성 안에 있던 고구려군은 대략 10만명, 그러나 진격해 오는 당나라 군사는 적어도 50만명에서 연이어 추가된 군사들까지 대략 100만명에 가까웠다고 전해진다.
당나라 대군을 상대로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은 안시성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성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는 지구전을 선택했다. 이에 당나라 군대는 그 어마어마한 군사 수를 바탕으로 60일 만에 안시성 동남쪽에 흙으로 높은 산을 쌓아 이를 안시성 공격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흥미롭게도 이들의 전략은 오히려 고구려에 이롭게 작용했다. 이 토산이 무너지면서 고구려 성벽을 함께 허물어트린 것이다. 양만춘은 결사대를 편성하여 재빨리 성벽 밖으로 나와 이 토산을 점령하고 계속된 당나라의 공격을 물리쳤다. 토산을 빼앗긴데다 추위가 닥쳐오고 식량마저 떨어지자 당군은 철군을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3개월에 걸친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역사의 뒷 이야기
그런데 이 안시성 전투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국의 어떤 역사서도 안시성 전투 당시 양만춘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중국 청장관 이덕무의 저서 [청장관전서]에는 ‘천추에 대담한 양만춘이 활을 쏘아 당 태종의 눈동자를 맞혔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려의 학자 이색이 지은 [정관음유림관작]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 한다. 즉,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당 태종의 눈을 쏘아 맞혀 안시성 전투 중 그가 한쪽 눈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저 야사로 취급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당나라 역사는 이를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숨어있다. 안시성에서 당군이 퇴각할 때, 양만춘 장군이 성루에 올라 송별의 예를 갖추자 당 태종이 성을 지켜낸 양만춘의 기개를 높이 사 비단 100필을 보내어 그의 충절을 격려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군을 이끌고 진격한 전투에서 작은 성 하나를 침략하지 못한 채, 무수한 군사들과 자신의 한쪽 눈을 잃고 퇴군을 하는 상황에서 적군의 장수에게 비단을 하사한다는 이야기가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안시성 전투는 이렇게 훈훈히 마무리 되었던 것일까?
당태종이 선택한 퇴각로는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 발해만으로 흘러가는 강, 요하를 건너는 것이었다. 요하 하류는 강물의 범람이 심하여 곳곳이 늪지대인 곳이다. 다시 말해 갈대와 진흙 투성이인 늪지대를 한두 사람도 아닌 거대한 군대가 건넌다는 것은 과히 지혜로운 결정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우리가 보더라도 훈훈한 장면을 연출하고 퇴각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장소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당 군의 후퇴에는 이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절박함 혹은 긴박함이 있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더구나 당나라는 고구려 진격 당시 거대한 수군을 동원해 고구려 해안 방어 기지였던 비사성을 함락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그들의 퇴각 당시 그들은 왜 이 수군을 이용할 수 없었던 것일까. 최근 안시성 전투에 대한 새로운 의견들이 쏟아지고 있다. 당나라 수군이 움직일 수 없었던 까닭은 고구려의 수군에 의해 이미 그 힘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당나라의 고구려 진격 당시 요동의 성들을 모두 함락하였다는 기록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고구려 군의 작전상 후퇴였으며, 당나라 군이 재 집결하였을 당시는 이미 고구려군이 이 지역을 재탈환했다고 주장한다.
이를 더하여 고구려군이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까지 당태종을 추격했을 거라는 주장도 있는데 지금껏 이 이야기는 거의 전설로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 태종의 퇴각로를 볼 때, 그가 진군하며 요동의 고구려 성들을 하나 둘 다 쓰러트렸다면 왜 그는 진군했던 땅을 통해 퇴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또한 그가 대군의 수군을 몰고와서 당나라의 수군들이 고구려에 주둔해 있었다면, 그는 왜 당 수군의 전함들을 통하여 북경으로 돌아가지 않고 스스로 진흙탕을 헤치는 길을 택했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역사란 사실에의 입증이라기보다 남겨진 자료에 의한 시대의 재해석, 즉 가정과 가설에 대한 믿음이다. 하지만 남겨진 자료들이 사실적 기록보다 어떠한 목적을 향한 필자의 의견이 가감되었을 때, 후대는 역사에 대한 혼란을 겪는다. 우리는 이 위대한 전투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중국은 언제나 거대한 대국이었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땅을 지켜내는 전투를 해왔다고,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던 그 이상의 위대함이 고구려에 있지 않았을까. 역사가 결국 믿음이라면, 나는 1500년전 우리 고구려 선조들이 고조선 땅을 달리며 위엄을 떨치는 모습을 그리고 싶다.
글 윤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