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의 발명가인 스웨덴의 알프레드 노벨이 작성한 유언에 따라 매년 인류의 문명 발달에 학문적으로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1901년부터 시작된 이 상은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의학상, 문학상, 평화상, 경제학으로 부문이 나누어져, 노벨의 기일인 매년 12월 10일에 시상된다. 평화상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나머지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수상식이 열리며, 수상자는 수상식 약 두 달 전쯤 스톡홀름과 오슬로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된다. 세계적으로 높은 권위와 기치를 가지며, 국적은 일체 불문하고 수상자를 선정하는 이유로 공식 기록에는 수상자의 출생지와 사망지(사망하였을 경우)만 기록된다.
오스트리아는 21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로 세계에서는 10위를, 인구당 노벨상 수상자 통계는 4위로 높은 순위를 자랑한다. 특히 화학과 의학 분야에서 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이번 여름호에서는 오스트리아 노벨상 수상자 다섯 명을 수상 순으로 알아보겠다. 나머지는 수상자들은 다음 호에서 알아보자. 여기서 “노벨상 수상자“란 오스트리아 출생이거나 오스트리아 국적인 경우를 모두 포함한다.
베르타 폰 주트너
Bertha von Suttner, 1843 – 1914
소설가이자 평화주의자로, 여성으로서도 오스트리아인으로서도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1843년 6월 9일 합스부르크 제국의 속국이던 프라하에서 오스트리아 육군 원수 프란츠 요제프의 딸로 태어났다. 1873년 오스트리아 빈의 주트너 남작의 가정 교사가 취직한다. 그는 자신보다 7살 어린 그 집안의 막내아들 아르투어와 연인이 되어 약혼하지만, 가족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하지만 나중에 가족 몰래 그와 비밀 결혼식을 올린다.
1876년 알프레드 노벨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물론 비서로 고용된 지 2주일 만에 일은 그만 두었지만, 그 이후로도 평생 노벨과 서신을 교환하며 각자의 생각을 전하곤 했다. 노벨이 노벨상에 평화 부문을 포함시킨 것도 베르타의 역활이 컸다고 추정된다. 1889년 세계 반전문학의 대표작인 “무기를 내려놓으라!“ (Die Waffen nieder!)를 발표하면서 평화주의의 선구자로 떠오른다. 이 소설은 한 군인의 딸의 인생을 그린 이야기로 그 시대의 전쟁의 물리적, 정신적 아픔을 잘 나타내고 있다. 1891년 오스트리아 평화주의 기구를 설립하며, 그녀의 평화주의 운동은 세계적으로 알려진다. 1891년 세계평화회의에서 국제평화국 부국장으로 선출되었고, 1892년 독일평화협회를 창립했다. 평생을 평화운동에 헌신한 그녀는 1905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1914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초상화는 1,000실링에 그려져 있었으며, 현재는 2유로 동전에서 그녀를 볼 수 있다.
알프레트 헤르만 프리트
Alfred Hermann Fried, 1864 -1921
평화주의자이자 저널리스트로 1911년 법학자인 토비아스 아써(Tobias Asser)와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유대인으로서 오스트리아 및 독일의 평화 협회를 세웠으며, 국제 평화 운동에 활약하였다. 그는 15세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서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1883년 베를린으로 이사해 개인 서점을 열었다. 27세에 신문에서 베르타 폰 주트너가 주도하는 평화운동에 대한 기사를 읽고는 베르타에게 즉각 서한을 보냈다.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준다면 본인이 편집장이 되어 평화 잡지를 발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1891년 베를린에서 반전 평화 잡지를 발행하게 된다. 이어 두 사람은 독일평화협회를 설립하였다. 프리트와 베르타는 20여년간 진정한 친구이자 든든한 동료이자 파트너였다. 프리트는 평화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세계 경제협력과 정치기구 간의 협력이 평화의 기반이라고 여겼다. 1903년 베를린에서 빈으로 돌아온 프리트는 집필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베른평화사무국 위원이었으며 중부유럽국제화해위원회 사무총장이었고 국제평화언론연맹의 사무총장도 맡았다. 프리는 군비축소를 강조하며, 국가 간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어떠한 기구가 있다면 군비축소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국제연합의 탄생을 예견한 주장이었다. 한평생을 평화에 대해 말하고 쓰던 그는 191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21년 57세로 가난과 질병을 이기지 못하여 세상을 떠났다.
로베르트 바라니
Robert Bárány, 1876 – 1936
이과 박사로 1914년에 노벨 생리학 의학상을 받았다. 1876 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로베르트 바라니는 결핵으로 인해 장애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의학을 공부하고자 했던 바라니는 1900년 오스트리아 빈 의대를 졸업한 뒤, 독일에서 공부하며 신경학 연구에 힘썼다. 1903년에 빈으로 돌아와 폴리처 교수의 연구원으로 일했다. 1914년 어지러움증에 관한 연구인 내이 전정기관의 생리·병리학 연구로 노벨의학상을 수상한다. 그 후 스웨덴으로 이주, 1917년 웁살라 대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1924 년 스웨덴 정부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27년부터 스웨덴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배 양성에 힘썼다. 그는 전정기관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바라니 징후를 발견함으로써 현대 의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프리츠 프레글
Fritz Pregl, 1869 – 1930
오스트리아의 화학자로 유기화합물의 미량분석 기술을 개발해 1923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프리츠는 그라츠 대학에서 공부했고 1893년 의사자격을 취득했다. 1913년부터 그라츠 대학 의화학연구소 소장으로 일했다. 그는 유기 화합물의 극히 적은 양을 잴 수 있는 미량저울을 고안했다. 그의 연구 성공으로 과학자들은 1㎎의 물질만으로도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신장의 기능적 용량을 결정하는 간단한 방법을 개발했으며, 원소 분석법을 새롭게 완성하여 화학·생리학·의학·공업 등 여러 방면의 연구를 크게 발전시켰다.
리하르트 아돌프 지그몬디
Richard Adolf Zsigmondy, 1865 – 1929
빈에서 출생한 화학자로 콜로이드 화학에 공헌하여 1925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빈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1889년에 뮌헨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교수로 지냈으며, 1903년 콜로이드 입자를 검사하기 위한 한외 현미경(특수 조명법을 써서 보통의 현미경으로는 볼 수 없는 입자를 분별할 수 있는 현미경)을 발명하였다. 그는 1907년부터 1929년까지 괴팅겐 대학교의 무기화학연구소 교수 밑 소장으로 재직했으며, 금 콜로이드를 비롯하여 각종 콜로이드 용액의 제법 및 그 성질을 연구하였다. 그가 이룬 업적은 생화학과 세균학에 크게 이바지되고 있다.
글 이예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