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에서는 독립운동에 관련한 영화와 공연들이 많이 상연되고 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아마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일 것이다.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는 수 많은 독립 투사와 애국 열사들 사이에서도 가장 대중적으로 친숙하고 잘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일 것이다. 한 역사 인물의 이야기가 동요로 만들어 불리워 지는 것이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삼월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로 시작하는 동요 ‘유관순 누나’는 매년 3월 전국의 각 초등학교에서 아직도 울려퍼지고 있다.
지령리 소녀
우리에게 ‘누나’로 더 친숙한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지금의 천안 지역에서 민족 계몽 운동에 앞장섰던 유중권 선생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당시 충북지역은 선교사들이 중심적으로 선교활동을 펴던 곳이었다. 그녀의 고향 지령리에도 1901년 이미 교회가 세워졌었다. 그러나 지령리 교회는 의병을 토벌한다는 명목하에 1907년, 일본군에 의해 방화되어 소실되었다. 유관순의 육촌 할아버지 유빈기씨는 교회가 불타 없어진 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령리의 한 초가를 얻어 십자가를 붙이고 선교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유관순의 할아버지 유윤기씨를 전도했는데, 그 후 일가 모두가 개신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그녀는 어릴적부터 자연스럽게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유관순의 삶이 급변하는 계기가 된 것은 아마 이화학당에 들어가면서 부터가 아닐까 싶다. 1916년 지령리 교회 샤프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그녀는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게 된다. 그리고 2년 후인 1918년, 이화학당 고등과고 진학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1919년 3.1운동 당시 그녀는 고작 고등학교 1학년, 어린 소녀일 뿐이었다.
3.1운동의 서막
제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던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공포했다. 이는 유럽의 힘있는 국가들이 그들의 무력을 이용하여 약소국을 점령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로서 각 민족은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국가를 운영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1차 세계대전이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 자결주의 정신은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이는 다른 나라들의 간섭을 받고 있던 약소국들에게 커다란 희망과 도전으로 다가왔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는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땅에도 독립의 소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 후 각 청년들이, 해외 유학생들이, 학생들이, 각 종교계 단체들이 서서히 뜻을 세워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3.1운동의 불씨를 당긴 것은 아마 2.8독립선언이 아닐까 싶다. 동경에 유학중이던 한국 유학생들은 조선 유학생 학우회를 중심으로 1919년 2월 8일 대한민국 독립선언을 실시하며 독립운동의 결의를 만방에 표했다. 이 소식은 곧 고국에 퍼졌고,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3.1 독립 선언을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는 민족대표 29인을 필두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이 거행식은 독립선언서 낭독과 이어진 만세 삼창의 아주 짧고 간결한 예식이었으나 그곳에 모인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에 의해 이 만세 물결은 전 시가지로 확대되어 날이 저물도록 그칠 줄 몰랐다. 이 만세 운동의 중심에는 학생들이 있었다. 이화 학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곳에 이화학당의 비밀결사대에 몸담았던 유관순 열사가 있었다.
3.1운동에 많은 학생들이 참여한것이 알려지자, 일본군은 3월 10일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아이러니 하게도 서울에만 국한되어 있던 만세운동은 일본군의 휴교령 반포로 인하여 전국으로 확산되게 된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경험한 학생들이 학교가 휴교되면서 고향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만세운동을 전파했던 것이다. 유관순도 독립선언서를 품에 안고 귀향하여 고향에 이 소식을 전하고, 어른들을 설득하여 그곳에서 만세운동의 계획을 세워갔다.
아우내 장터에 울려퍼진 “대한 독립 만세!”
유관순을 따라 그녀의 고향에도 대한 독립의 꽃이 피어났다. 4월 1일, 아우내 장날, 유관순은 그동안 손수 만든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일 정오, 그녀의 연설을 필두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역사적으로 기억되는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그곳에 모인 3천 여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을 내세워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을 계속했다.
민중의 만세 행렬에 일본군은 바로 무력 진압을 시작하였다. 태극기를 든 시위대는 일본 헌병들의 총검앞에 무참히 쓰러져 갔다.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과 모친 이소제도 그녀가 보는 앞에서 순국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잠깐 반가운 만남은, 공주영명학교에서 만세운동을 하다 잡혀온 그녀의 오빠 유우석과의 만남이었다. 가족은 닮는다는 말이 슬프고도 자랑스러울 순간이었을 것이다.
서대문 형무소의 마지막 1년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법정에서까지 ‘나는 한국사람이니 너희는 나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가 없다’고 당당히 주장했다던 그녀의 절개는 심히 놀라울 수 밖에 없다. 그 후 그녀는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지며, 그곳에서 3년 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녀의 수감생활, 즉 그녀의 삶의 마지막 1년은 바로 얼마전 개봉 된 ‘항거: 유관순 이야기’가 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가 한 단어로 짧게 말하는 ‘모진 고문’이 도대체 무엇인지, 사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녀의 사인이 ‘장독-심한 매질로 인한 독으로 인한 사망’이라 추측대는 만큼 그 마지막 1년 그녀는 그곳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문을 당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녀는 감옥에 투옥 되었으나, 그녀의 영혼은 그곳에 갇혀있지 않았다. 가장 아름답게 기억되는 또 하나의 이야기. 바로 1920년 3월 1일, 1년전 그날을 기념하여 울려퍼진 만세 소리이다. 그리고 그 시작에 옥중에 갇혀있던 유관순이 있었다. 그녀는 함께 수감된 동료들과 3월 1일을 기념하여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만세 소리는 당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있던 3천여명의 동포들의 심장을 터트리고, 형무소 담장을 넘어 밖으로 퍼져나갔다.
그 후, 이 사건으로 인해 그녀가 얼마나 더 끔찍한 고문을 당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이야기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은 9월 28일,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그 짧은 생을 거둔다.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비참한 조국의 현실 앞에, 일본의 앞잡이로 돌아선 조선인 순사가 그녀에게 묻는다.
정춘영 :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
유관순 : “자유!”
정춘영 : “자유? 자유가 뭔데?”
유관순 : “하나뿐인 목숨, 내가 바라는대로 쓰는 것. 그것이 자유다!”
글 윤설희 기자